‘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세상에 나온 아이. 에릭 에릭슨.
그의 개인적 경험이 훗날, 곧 그 유명한 정체성 이론의 근간을 이루게 될줄이야~
정체성 위기의 씨앗 – 에릭슨의 어린 시절
1902년 6월 15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에릭 살로몬센(Erik Salomonsen). 그러나 이 이름은 그의 평생을 따라가지 못했다.
어머니 카를라 아브라함센은 덴마크 출신 유대인이었고, 에릭의 생물학적 아버지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을 지켰다.
이처럼 출생부터 정체성이 불분명했던 경험은 훗날 에릭슨의 이론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에릭의 어머니 카를라는 임신 중 남편과 별거한 채 독일로 건너왔고,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미혼모로 아이를 낳는 일은 엄청난 사회적 낙인을 감수해야 했다.
에릭은 이 사실을 성장한 후에야 알게 되었고, 그 충격은 곧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졌다.
3세 무렵, 어머니는 소아과 의사인 테오도르 홈부르거와 재혼하게 된다.
이후 에릭은 새아버지의 성을 따르게 되며 ‘에릭 홈부르거(Erik Homburger)’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이 이름 역시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속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그의 갈증을 완전히 해소해주지는 못했다.
어린 시절의 이러한 배경은 훗날 에릭 에릭슨이 심리사회 발달 이론에서 강조하게 되는 “정체성 위기(identity crisis)” 개념의 근원이 되었다.
에릭슨의 정체성 이론은 바로 이 불안정한 뿌리에서 자라난 나무와도 같다.
예술가를 꿈꾸던 청년, 에릭 에릭슨의 방황기
에릭 에릭슨의 청소년기는 외모와 출신으로 인한 이중적 소외감 속에서 시작되었다.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그는 독일 학교에서는 유대인으로, 유대인 회당에서는 비(非)유대인으로 간주되었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주변인적인 정체성은 그의 내면에 깊은 고독과 혼란을 남겼으리라!
독일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김나지움 시절, 그는 평균적인 성적의 학생이었다.
어머니와 새아버지는 의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에릭의 마음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그림에 빠져 있었고, 특히 인물의 내면을 포착하는 초상화에 큰 재능을 보였다.
정체성의 혼란을 예술로 풀어내려는 시도였는지도 모른다.
1920년, 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대학 진학을 거부하고 유럽 여행을 떠난다. (그의 방황이 부럽군!)
당시에는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배낭을 메고 이탈리아로 향했고, 르네상스 예술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플로렌스의 우피치 미술관을 찾았다.
로마에 머무는 동안에는 한 달간 거리 화가로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다.
이 시기의 에릭은 그저 예술가를 꿈꾸는 젊은이가 아니었는지 모른다.
그는 정체성을 찾아 유럽을 떠돌며, 자신이 누구 인지를 탐색하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이 ‘방황의 시간’은 그가 이후 심리학자로서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깊은 공감을 제공해준 자산이 된 셈이다.
에릭 에릭슨의 정신분석 입문계기
1927년, 25세의 에릭 에릭슨은 오스트리아 빈의 한 사립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운좋게도 그 학교는 단순한 교육 기관이 아니었다.
정신분석적 교육을 실험적으로 도입한 이 학교는 유럽과 미국의 저명한 정신분석가 자녀들이 다니는 특별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에릭슨은 단순히 그림을 가르치는 것을 넘어, 아이들의 표정과 행동, 마음의 흐름을 세심하게 들여다보았다.
그의 이런 남다른 관찰력은 결국 한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녀는 바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딸이자 아동 정신분석의 선구자, 안나 프로이트였다.
그 만남은 운명처럼, 스승이 제자를 알아보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안나는 학문적 배경이 없던 에릭슨에게서 특별한 감각을 발견했고, 이후 직접 정신분석의 기초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에릭슨은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빈의 베르가세 19번지에 위치한 프로이트 집을 찾아가 그녀에게 직접 분석을 받았다.
이 심층적 정신분석은 무려 6년 동안 지속되었고, 에릭슨의 내면과 사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이 시기를 통해 이론적 지식을 넘어서 사람의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태도를 체화하게 되었고, 이후 정체성 이론의 심리적 기반을 다지게 된다.
안나 프로이트는 그에게 “당신은 아이들의 마음을 읽는 타고난 재능이 있다”며, 아동 분석가로서의 길을 적극 추천했다.
또한, 그는 이 학교에서 몬테소리 교육도 접하게 된다.
자율성과 자기 주도성을 중시하는 몬테소리의 원칙은 그에게 아동 발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열어주었다.
이 모든 경험은 훗날, 에릭슨이 자신만의 심리사회 발달 이론(psychosocial development theory) 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밑거름이 되었음은 당연하다.
평생의 동반자, 조안과 에릭 에릭슨
에릭 에릭슨이 조안 시로스(Joan Serson)를 만난 건 정신분석 수련 중이던 오스트리아 빈에서였다.
조안은 캐나다 출신의 무용가이자 교사였고, 당시 유럽에서 무용 치료와 아동 교육을 공부하러 왔던 열정적인 사람이다.
에릭슨은 조안에게서 단순한 애정을 넘어, 깊은 지적 공감과 감수성을 느꼈다.
그리고 조안은 에릭슨이 심리학자로 성장해가는 여정을, 늘 곁에서 지켜보며 힘이 되어주었다. 그녀는 단지 ‘내조하는 아내’를 넘어, 진정한 ‘지적 동반자’였다.
1930년,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린다.
그들은 전통적인 부부의 틀보다는, 서로의 사유와 비전을 공유하는 창조적 파트너로서의 모습이 더 두드러졌다.
에릭슨이 집필한 수많은 논문과 저서들에는 조안의 흔적이 가득하다.
특히 에릭슨이 개념을 정리할 때, 조안은 날카로운 통찰과 균형 잡힌 시선으로 글을 다듬어주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 시절, 관행 속에서 책에는 오직 남편의 이름만 올라갔다.
누군가의 이론이 빛날 수 있었던 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함께 걸어준 이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조안이라는 거울을 통해 에릭슨은 자기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고, 인간 발달의 복잡하고 섬세한 결들을 잡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에릭 에릭슨의 가족 이야기
에릭과 조안, 두 사람 사이에는 네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첫째 아들 카이는 193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훗날 예일대학교 사회학 교수가 되었고, 공동체 붕괴와 정체성의 사회적 영향을 연구하며 아버지의 이론을 또 다른 방식으로 계승했다.
둘째 존은 비교적 조용한 삶을 살았지만, 에릭슨 부부가 생애 말년에 공동 집필한 『Life Cycle Completed』의 공동 저자로 참여하면서 내면의 깊이를 드러냈다.
막내딸 수는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성격을 지닌 심리치료사로 성장했고, 아버지의 명성과 그림자 속에서 살아온 복잡한 경험을 회고록 『In the Shadow of Fame』에 담아냈다.
그녀는 그 책에서 아버지를 위대한 이론가로 존중하면서도, 가족 안에서는 감정적으로 멀게 느껴졌던 아버지의 모습을 솔직히 드러냈다.
에릭슨 가족 이야기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장면은 넷째 아들 닐의 존재다.
닐은 1944년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태어났고,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의료진의 권고 속에서 시설에 보내졌다.
에릭슨 부부는 다른 자녀들에게 닐이 태어난 사실조차 알리지 않았고, 그는 가족의 기억에서 지워진 채 살아갔다.
실제로 닐은 21세까지 생존했지만, 부모와 형제들과의 직접적인 접촉 없이 생을 마쳤다.
이 사실은 수가 성인이 된 이후에야 알려졌고, 그녀는 이 일을 ‘말하지 않은 비극’이라 부르며 깊은 상처로 회고한다.
에릭 에릭슨은 평생 ‘정체성’, ‘자아’, ‘통합’ 같은 개념을 이론으로 설명했지만, 그 개념들이 정말 살아 움직인 곳은 연구실이 아니라 가족 안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모른 채 자라며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품었고, 아버지가 된 후엔 그 질문에 삶으로 답하려 했다.
그러나 모든 답이 이상적일 수는 없었다.
때로는 실패했고, 때로는 침묵했으며, 때로는 두려움 속에서 외면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에릭슨의 이론은 더욱 인간적이다.
그는 말뿐인 학자가 아니라, 자신의 이론을 끊임없이 삶 속에서 실험하고, 때로는 흔들리고, 그러나 끝까지 진심으로 씨름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가족은 그 실험의 장이었고, 동시에 거울이었다.
거기엔 정답은 없었지만, 그가 끊임없이 붙잡았던 진지함만은 분명히 남아 있었다.
에릭 에릭슨과 인디언 소년의 만남
‘정체성은 보편적인가, 문화마다 다른가?’
이 질문은 에릭슨을 책상 너머, 낯선 땅으로 이끌게 되었다.
그는 곧 미국 원주민 공동체의 삶을 직접 관찰하기 위해 사우스다코타의 라코타족 보호구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약 6개월간 머물며, 에릭슨은 라코타족 청소년들의 일상과 내면, 그리고 그들 삶에 얽힌 문화적 갈등을 면밀히 관찰했다.
당시 라코타족 아이들은 공립학교에서 영어 교육을 받고 기독교 문화에 노출되면서,
전통 부족 문화와 서구 백인 사회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다.
부모 세대는 여전히 토착 신앙과 공동체 중심의 삶을 중시했지만, 아이들은 학교에서 개인주의적 가치관과 서구식 삶의 방식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질적인 두 문화 사이에서 방황하던 한 15세 라코타 소년은 에릭슨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인디언도, 백인도 아니야. 나는 도대체 누구지?”
그 말은 단순한 청소년의 고민이 아니었다.
그건 전통과 근대, 공동체와 개인, 뿌리와 적응 사이에서 분열되는 정체성의 균열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말 한마디가, 에릭슨이 평생 품어온 질문과 맞닿아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사회는 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그 말은 에릭슨이 평생 품고 있던 질문과 정확히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정체성 위기(identity crisis)는 단지 개인의 혼란 뿐만 아니라,
사회와 문화의 틈에서 생겨나는 깊은 심리적 균열이라는 것을…
정체성 이론과 8단계 심리사회 발달 이론의 탄생

에릭 에릭슨, 정체성을 묻는 심리학자
1950년, 에릭슨은 자신의 대표작 《유년기와 사회》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프로이트의 5단계 성적 발달이론을 8단계 심리사회적 발달이론으로 확장했다. 가장 혁신적인 점은 발달이 평생에 걸쳐 일어난다고 본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이론의 영감은 그의 개인적 경험에서 나왔다.
자신의 정체성 위기, 아버지에 대한 의문, 문화적 적응 경험 등이 모두 이론화 된 것 이다.
[신뢰 대 불신], [정체성 대 역할 혼돈] 등의 개념은 그의 삶 자체가 반영된 것이었다.
특히 정체성 위기(identity crisis) 라는 용어는 에릭슨이 만든 것으로, 현재까지도 심리학뿐 아니라 일상 언어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 개념이 1960년대 미국 청소년 문화와 맞아떨어지면서 에릭슨은 일약, 유명인사가 된다.
『청년 루터』 – 심리학으로 읽는 역사 인물

에릭슨의 말년은 비교적 평온했다.
1970년 하버드에서 은퇴한 후에도 왕성한 저술 활동을 계속했고, 특히 위인들의 심리 전기를 쓰며 자신의 이론을 검증했다.
에릭 에릭슨하면 발달심리와 정체성이론의 심리학자로 잘 알려져 있으며, 특히 사회복지사 1급 시험에서는 절대 빠질 수 없는 시험공부 대상이기도 하다.
다음은 사람들이 잘 모를 수 있는 저자로서의 에릭의 책 두권을 추천해본다.
1958년 출간된 《청년 루터》는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의 삶을 심리분석적 관점에서 조명한 독특한 전기다.
에릭슨은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단순한 종교적 반발로 보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청년 루터가 겪은 내적 정체성 갈등의 결과물로 해석했다.
단순히 한 인물의 일대기를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넘어, 그 사람의 내부 세계가 어떻게 사회적 운동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연결성이 깊음을 느낄수 있다.
루터는 아버지와의 갈등, 수도사로서의 죄의식, 그리고 교회 권위에 대한 저항을 통해 자신만의 신념을 형성해나갔다.
에릭슨은 이 과정을 정체성 위기(identity crisis)의 전형적인 사례로 분석했다.
특히 루터가 개인적 불안을 사회적 저항으로 전환시킨 과정은, “개인적 진실이 역사적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통찰을 보여준다.
루터 역시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고민했던 인물이었고, 에릭슨은 여기서 자신의 투영을 발견했다. 비텐베르크 대학을 방문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다는 성 교회 문을 직접 만져보며, “반항도 때로는 성장의 한 과정”이라고 중얼거렸다고 전해진다.
『간디의 진리』 – 비폭력과 정체성 위기
1969년 발표된 《간디의 진리(Gandhi’s Truth)》는 에릭슨이 인도 독립운동의 상징, 마하트마 간디의 삶을 심리사회적 관점에서 분석한 저작이다.
그는 간디의 청년 시절, 영국 유학 중 겪은 문화적 혼란과 자아 갈등에 주목했다.
서구의 교육과 인도 전통 사이에서 방황하던 간디가 어떻게 비폭력 저항이라는 철학을 만들어냈는지를 에릭슨은 ‘정체성 위기’라는 개념으로 풀어낸다.
이 책에서 에릭슨은 간디의 사상 형성과 실천이 단순한 정치 전략이 아니라, 개인 심리의 성숙 과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한다.
간디가 내면의 불안과 사회적 억압을 통합하며 ‘사티아그라하(진리의 힘)’라는 운동을 창조해낸 과정은, 정체성이 어떻게 사회적 도덕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였다.
《간디의 진리》는 1970년 퓰리처상과 전미 도서상(National Book Award)을 수상하며, 에릭슨의 정체성 이론이 학문적 분석을 넘어 인류 공동의 윤리적 성찰로 확장될 수 있음을 증명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이론의 한계와 자기 반성 – 비판에 대한 응답
에릭 에릭슨은 학계의 여러 비판에도 직면해야 했다. 특히 여성주의 학자들은 그의 이론이 남성 중심적이라고 비판했다.
1960년대 후반 베티 프리단을 비롯한 페미니스트들은 “에릭슨의 여성 발달 이론은 전통적 성역할에 갇혀 있다”며 강하게 반발한 것이다.
이에 대해 에릭슨은 솔직하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했다.
1975년 한 강연에서 그는 “나는 내 시대의 남성이었고, 여성의 경험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며 겸손함을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 발달의 기본 원리는 성별을 초월한다”는 자신의 신념은 굽히지 않았다.
또 다른 비판은 그의 이론이 서구 중산층 경험에 치우쳐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도 에릭슨은 “모든 이론은 한계가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이론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느냐”라고 대답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자신의 8단계 이론 중 마지막 단계인 “자아통합 대 절망”을 몸소 실천했다는 것이다. 90세가 넘어서도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지혜로운 노년을 보냈다.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 그는 스스로 자신의 성을 ‘에릭슨(Erikson)’으로 바꿨다.
‘에릭의 아들(Eric’s son)’이라는 뜻의 이 이름은, 역설적으로 누구의 아들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기를 정의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이름을 새로 짓는 행위는, 그에게 있어 정체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찾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내경우도 마찬 가지이다.
에릭 에릭슨의 유산 – “나는 누구인가”의 유산
에릭슨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인간 발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었다.
그는 인간이 평생에 걸쳐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적 메시지를 전했다.
또한 문화와 사회가 개인 발달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함으로써 심리학의 지평을 넓혔다.
그의 이론은 교육학, 사회복지학, 경영학 등 다양한 분야에 응용되고 있다.
특히 정체성 개념은 현대 사회의 핵심 화두가 되었다.
다문화 사회, 글로벌화,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에릭 에릭슨의 삶 자체가 그의 이론을 증명하는 사례였다. 정체성을 찾아 헤매던 소년이 인간 발달의 대가가 된 것, 이것이야말로 그가 말한 “자아실현”의 완벽한 예시가 아닐까.
그의 질문들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