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라캉 1편 – 인간라캉 인물탐구

자크 라캉의 글은 어렵다못해 고통스럽다라는 사람도 있다.
거울단계 이론과 세미나, 에크리논문으로 유명한 자크 라캉. 그는 누구였을까?
그의 유년기부터 결혼생활, 사생활, 그리고 죽음까지, 한 인간으로서 라캉의 삶을 다큐처럼 따라가본다.

1. 자크 라캉의 출생과 어린 시절


라캉은 1901년 4월 13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자크 마리 에밀 라캉(Jacques Marie Emile Lacan)이었고, 삼남매 중 맏이였다.
아버지 알프레드는 비누와 기름을 판매하는 성공한 세일즈맨이었고, 어머니 에밀리는 매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어머니의 깊은 신앙심은 집안 전체의 분위기를 좌우했는데, 그 영향이 얼마나 강했는지 라캉의 남동생 중 하나는 나중에 수도원으로 들어갈 정도였다.

그는 1907년부터 1918년까지 예수회의 명문 사립학교에 다녔다.
그는 종교학과 라틴어에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특히 스피노자의 사상에 심취하면서 종교적인 신념을 버리고 무신론자가 되었다.
이는 어쩌면 어린 시절의 강압적인 종교적 분위기에 대한 반작용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로 인해 가족과의 마찰은 당연하다.
1920년에는 너무 말랐다는 이유로 군 면제를 받고 의과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2. 청년 자크 라캉

1920년 의과대학에 입학하며 인간의 신체와 정신에 대한 이해를 넓혀갔다.
특히 정신병리학에 깊은 관심을 보인 라캉은 1927년부터 1931년까지 생 안느 병원에서 정신과 레지던트로 근무하며 실제 임상 경험을 쌓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기존 정신의학의 한계점을 인식하고, 무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사상에 깊이 빠져들었다.
1932년 “편집증적 정신병과 인격의 관계”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이 논문에서 한 여성 환자의 망상적 심리를 분석하며 환자의 자기 동일시 과정에 대한 통찰을 제시했다.
놀랍게도 라캉은 이 논문 사본을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 직접 보냈고, 프로이트는 엽서를 통해 수령 확인 답장을 보내왔다.
이것이 라캉과 프로이트 사이의 유일한 직접적인 소통 기록으로 남아있다.


1934년, 라캉은 마침내 파리정신분석협회(Société Psychanalytique de Paris)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이는 그가 의학도이자 정신과 의사에서 정신분석가로 공식적으로 전환하는 상징적인 해였다.

청년 라캉의 이 시기는 그의 후반부 사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엄격한 의학 훈련, 파리 아방가르드와의 교류, 초현실주의적 상상력, 그리고 정신분석학에 대한 열정이 모두 한데 어우러진 이 시기의 경험들이, 훗날 그의 독창적인 정신분석 이론의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3. 자크라캉의 사생활: 결혼, 연애, 그리고 자녀들

1934년 1월, 서른세 살의 라캉은 마리-루이즈 블롱드와 결혼한다.
흥미롭게도 그들의 첫 아이 카롤린이 바로 그 달에 태어났는데, 이는 결혼 전 임신이었음을 의미한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스캔들러스한 일이었을 것이다.
마리-루이즈는 라캉이 병원에서 근무할 때 만난 동료의 여동생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카롤린(1934년), 티보(1939년), 시빌(1940년) 세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하지만 라캉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1938년, 아직 마리-루이즈와 결혼한 상태에서 그는 실비아 마클레스-바타유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실비아는 그 유명한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의 전 부인이었다.
바타유는 ‘에로티즘’과 ‘성스러운 것’ 등으로 유명한 사상가로, 라캉과는 지적으로 깊은 교감을 나누던 사이였다.
친구의 전 부인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 그것도 지적으로 존경하던 친구의 전 부인과 말이다.
자크라깡도 드라마틱한 삶을 산 것 같다.

실비아 바타유는 자크 르누아르의 영화 「시골에서의 하루」에 출연한 배우이기도 했고, 샤를 뒤랭의 제자로 연극계에서도 활동했던 예술가였다.
라캉이 그녀에게 끌린 것은 단순한 외모나 매력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가 지닌 예술적 감수성과 지적 깊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1941년 7월 3일, 실비아는 라캉의 딸 주디트를 낳았다.
하지만 라캉이 아직 마리-루이즈와 결혼을 유지한 상태였기 때문에, 주디트는 혼외자 였다.
얼마나 복잡하고 슬프면서도 웃긴 상황인가?
자크 라캉과 실비아는 결국 1953년에 정식으로 결혼했다.
주디트가 태어난 지 12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합법적인 부부가 된 것이다.
라깡의 딸 주디트는, 나중에 그의 남편과 함께 아버지의 사상을 계승한 인물이다.


4-1. 중년의 라캉: 정신분석학계의 이단아 『에크리』의 탄생

자크 라캉의 저서를 묘사한 오래된 책 더미
자크 라캉의 주요 저작물(에크리,세미나)

자크 라캉의 중년은 그의 정신분석학이 무르익고 대중적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간 시기였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중반에 이르는 이 시기는 라캉이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을 재해석하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이론 체계를 확립하며, 동시에 프랑스 정신분석학계의 중심 인물로 자리매김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그의 혁신적인 접근 방식과 권위적인 태도는 기존 정신분석학자들과의 갈등을 빚기도 했다.

라캉의 독자적인 길은 국제 정신분석학회(IPA)와의 마찰로 이어졌다.
그는 분석 시간의 길이를 고정하지 않고 유동적으로 가져가는 “변동 세션(variable-length sessions)” 방식을 주장했는데, 이는 전통적인 분석 방식과 충돌했다.
결국 1963년, IPA는 라캉의 훈련 분석가 자격을 박탈하고 만다.
이 사건은 라캉에게는 좌절이었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가 제도적 제약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신분석학을 더욱 급진적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격동의 시기를 거치면서도 라캉은 꾸준히 자신의 이론을 정교화하고, 지성계에 영향력을 넓혔다.
그리고 이러한 중년기의 지적 성과와 활동의 정수가 바로 1966년 출간된 그의 대표 저서 『에크리(Écrits)』이다.
‘글 모음집’이라는 뜻의 『에크리』는 라깡이 약 30여 년간 발표했던 다양한 논문과 글들을 모아 엮은 것으로, 그의 생전에 출판된 유일한 저서로 간주된다.


이 책을 통해 라캉은 자신의 복잡하고 심오한 사상을 집대성하여 전 세계에 알렸고, 그의 정신분석학이 학문적 독립성을 확보하며 20세기 서구 사상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음을 천명했다. 중년의 라캉은 『에크리』를 통해 단순한 프로이트의 후계자가 아니라, 독창적인 사상가로서 확고히 자리매김한 것이다.


참고로 국내에서 『에크리』 책가격은 무려 현재, 14만원이 넘는다.
책 한권값이 이렇게 비싼것도 있나 싶기도 하지만, 그만큼 방대한 번역 작업과 저작권, 소량 생산의 결과다.
『에크리』는 여전히 라깡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이지만, 난이도가 매우 높기 때문에 입문자에겐 ‘라캉 사전’ 이라 불리기도 한다.
심지어 학자들 조차 텍스트라기보다 퍼즐같다고 할 정도로 난해한것으로 유명하다.


4-2. 라캉의 세미나: 살아있는 정신분석학 강의와 한국어 번역 현황

자크 라캉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세미나(Séminaire)는 그의 저서 『에크리』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라캉은 생전에 자신의 사상을 주로 세미나라는 강연 형식으로 전파했으며, 이 세미나들은 단순한 강의를 넘어 그의 사유가 형성되고 발전하는 역동적인 현장이었다.

라캉 세미나의 특징: 라캉의 세미나는 프랑스 파리에서 매주 진행되었으며, 처음에는 정신분석학자들을 대상으로 하다가 점차 철학자, 예술가, 학생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들이 참여하는 공개 강좌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 세미나의 가장 큰 특징은 다음과 같다.

  • 구술성의 중요성: 라캉은 글을 쓰는 것보다 말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의 세미나는 정교하게 준비된 원고를 읽어주는 방식이 아니라, 즉흥적인 질문과 답변, 청중과의 대화를 통해 사상이 전개되는 살아있는 강의였다.
    이는 그의 사유가 유동적이고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특징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그의 세미나는 결국 텍스트로 1,2,3… 등으로 책으로 출간되어 있다.

  • 난해함과 심오함: 라캉의 세미나는 그의 저서와 마찬가지로 매우 난해하다.
    그는 복잡한 철학적, 언어학적 개념들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며,
    청중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사유하도록 유도했다.
    그의 말은 때로는 비유적이고 암시적이어서 즉각적인 이해를 어렵게 만들지만,
    깊이 파고들수록 놀라운 통찰을 제공한다.
    수학적인 개념, 각종 도형과 기호들로 입문자는 물론이고 학자들도 어려워하는건 마찬가지다.

  • 사상의 발전 과정: 총 27개의 세미나(1953~1980)는 라캉의 정신분석학 이론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발전하고 변화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각 세미나는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프로이트의 원전을 재해석하고 새로운 개념들을 도입하며 라캉만의 독자적인 이론 체계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 영향력: 라캉의 세미나는 프랑스 지성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알튀세르, 푸코, 데리다 등 당대의 수많은 사상가들이 그의 세미나에 참석하여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사상은 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 영감을 주었다.
    현재도 자크 라캉은 여전히 연구대상이다.

  • 한국어 번역본 현황 : 라캉의 세미나는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지만, 그 방대함과 난해함 때문에 번역 작업이 쉽지 않다.
    현재 한국에서는 여러 출판사와 번역가들에 의해 라캉의 세미나 번역 작업이 진행 중이지만, 아직 모든 세미나가 완역된 것은 아니다.

  • 현재 출간된 주요 세미나 : 이 중 한국어로 공식 번역된 것은 다음 두 권 정도 이다.
    세미나 1: 프로이트의 기술론 (새물결)
    세미나 11: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 (새물결)

그 외 세미나들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지만, 일부는 대학 강의자료, 블로그 요약, 연구모임을 통해 소개되고 있다.
네이버, 티스토리 블로그, 페이스북 연구 그룹 등에서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다.
이런 자료들은 입문자에게 중요한 첫걸음이 된다.
완벽한 해석이 아니더라도, 라캉을 만나고 싶은 독자들에게 숨통을 트여주는 셈이다.


5. 말년 – 병, 고독, 그리고 죽음

1970년대 후반, 라캉은 점점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몸이 불편해졌지만 그는 강의를 멈추지 않았고, 꾸준히 사유를 이어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말수가 줄어들었고, 그의 사유는 점점 더 난해해졌다.
때로는 자신이 만들어낸 이론의 구조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말년의 라캉은 자신이 세운 정신분석 이론을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그는 수학의 매듭 이론이나 위상수학(토폴로지) 같은 개념들을 도입해,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라는 세 가지 차원이 어떻게 서로 얽혀 인간 주체를 형성하는지를 설명하려 했다.

그중에서도 보로메오 매듭을 활용한 시도는,
그가 얼마나 철저하고 집요하게 사유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은 그의 이론을 더 깊이 있게 만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점점 더 이해하기 어려운 미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1981년, 자크 라캉은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소박하게 치러졌지만, 그의 죽음을 기리며 프랑스 곳곳에서는 추모 강연과 세미나가 이어졌다.


이번엔 자크 라깡에 관한 인물탐구편이었다면, 다음편엔 그의 사상,학문에 관해 다루어 볼 예정이다.
나역시 라깡의 포스팅을 통해 라깡을 알아가고 있다.


Britannica – Jacques La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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