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정상’과 ‘치료’를 중심에 두는 기존의 관점에 늘 의문이 들었다. 그럴 때 처음 만난 이름이 제임스 힐먼이었다. 그는 프로이트도, 융도 아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내면을 바라보았고, 기존 심리학계에서조차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단적 사상가’로 불렸다.
목차
제임스 힐먼은 누구인가?
제임스힐먼(James Hillman)은 1926년 미국 뉴저지주 애틀랜틱 시티에서 태어났다. 학업은 파리 소르본 대학교에서 시작되었으며, 이곳에서 그는 유럽의 철학적 전통과 깊이 만나게 된다. 특히 현상학과 실존주의 철학에 대한 관심이 그의 사상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힐먼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은 1959년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융 연구소(C.G. Jung Institute)에 입학한 것이다. 당시 융 연구소는 칼 구스타프 융의 분석심리학을 체계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세계 유일의 기관이었다. 힐먼은 이곳에서 10년간 머물며 융 심리학의 깊은 내용들을 탐구하며, 분석가 자격을 취득했지만, 곧 융 심리학의 테두리를 넘어선다. 그리고는 ‘상상력의 심리학’, 또는 ‘영혼 중심 심리학’(Archetypal Psychology)이라는 독자적 이론 체계를 세운다.
융을 계승하되 넘어서다
제임스힐먼을 이해하려면, 그가 어떤 점에서 칼 융(Carl Jung)의 제자였고 또 어떤 점에서 벗어났는지를 짚어보는 게 중요하다. 힐먼은 스위스 취리히의 융 연구소에서 훈련을 받고, 그곳의 소장이 될 만큼 융 심리학에 정통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융 이론을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심층 심리학의 새로운 길을 또 하나 만들었다.
융이 무의식을 개인적 차원과 집단적 차원으로 나누고, 그 속에서 ‘자기(Self)’라는 중심을 향해 통합되는 과정을 중요시했다면, 힐먼은 그 통합과 치유라는 방향성 자체에 문제를 제기했다. “왜 인간은 항상 하나로 통합되어야만 하는가?” 힐먼은 오히려 인간 내면의 다중성과 복잡성, 그리고 그 안의 상징과 이미지들이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융도 융이지만, 힐먼도 만만치 않다. 나는 그의 통찰에 무릎을 칠 수 밖에 없다.
그는 무의식 속에 등장하는 상징들을 단지 해석하거나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 자체의 생명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이 힐먼의 핵심 사상인 ‘이미지 중심 심리학’(imaginal psychology)이다. 기존 심리학이 지나치게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틀 안에서 인간을 규정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비판하며, 그는 심리학이 ‘시적인 상상력’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융이 신화를 구조로 분석하고 인간의 발달 단계에 적용하려 했던 반면, 힐먼은 신화를 삶 그 자체로 살아내야 할 이야기로 본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문제는 해석될 대상이 아니라, 상징과 이미지로 경험되어야 할 무엇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힐먼의 사유가 훨씬 더 유연하고 예술적이라고 느끼는 건 나만이 아니겠지?
제임스힐먼은 융을 “아버지 같은 존재였지만, 결국 그에게서 나와야 했다”고 말한 적 있다. 그 말처럼 그는 융 학파 심리학이라는 뿌리에서 뻗어나간 또 다른 가지이다.
‘영혼의 코드’와 다이몬, 그리고 운명

우리는 이미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할 ‘코드’를 갖고 태어난다고?
힐먼은 이 말로 기존 심리학, 심지어 자기계발 서적에서조차 강조하는 ‘환경’과 ‘노력’ 중심의 통념을 뒤집는다.
도토리 한 알에 이미 참나무가 될 가능성이 들어있듯,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고유한 기질, 사명, 가능성을 품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건, 그 가능성이 타인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영혼이 스스로 선택해 온 것이라는 점이다. 즉, 우리는 운명을 따라가는 존재이지, 운명을 만들어내는 존재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힐먼은 이 개념을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 세계의 신화·철학·종교에 등장하는 ‘다이몬(daimon)’이라는 존재를 통해 설명한다. 다이몬은 인간과 신 사이의 중간자적 존재로, 힐먼은 이를 『The Soul’s Code(영혼의 코드)』에서 중심 개념으로 삼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이 책에서 그는 다이몬이 인간의 고유한 운명과 소명을 이끄는 내면의 안내자라고 주장한다.
그는 “각자의 영혼은 태어나기 전에 고유한 다이몬을 부여받으며, 이 다이몬은 우리가 지상에서 살아갈 특정한 이미지나 패턴을 선택한다”고 본다. 이는 그의 “도토리 이론(Acorn Theory)”의 핵심이다. 각각의 삶은 하나의 특별한 이미지에 의해 형성되며, 이 이미지가 그 삶의 본질이 되어 운명으로 부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삶의 이미지는 어떤걸 가지고 있을까?
힐먼은 개인의 문제를 단순히 ‘가정환경’, ‘성격’, ‘트라우마’ 같은 심리적 요인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고통조차도 다이몬이 이끄는 방향일 수 있고, 실패나 아픔마저도 삶의 설계에 포함된 것은 아닌지 질문을 던진다. 이 관점은 사실, 나로 하여금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내 아픔과 실패, 그리고 외로움이 과연 설계에 의한 거였을까? 그렇다면, 앞으로 펼쳐질 또 다른 예정된 운명은 어떻게 전개될까? 나의 다이몬이여, 오늘밤 꿈을 통해 보여다오!
제임스 힐먼의 핵심 개념 3가지
영혼(Soul)과 정신(Spirit)의 구분
제임스힐먼이 제시한 가장 혁신적인 개념 중 하나는 영혼(Soul)과 정신(Spirit)을 명확히 구분한 것이다. 기존 심리학에서는 이 두 개념을 혼용하거나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힐먼은 이들이 전혀 다른 성격과 기능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영혼은 깊이, 어둠, 감정, 상처, 기억, 내면으로 내려가는 힘이다. 영혼의 특징은 이미지를 통해 사고하고, 감정을 중시하며, 관계성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힐먼에 따르면 영혼은 병리를 통해서도 자신을 표현하며, 증상이나 고통 역시 영혼의 메시지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반면 정신은 위로 향하는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 진리, 초월, 완성, 상승, 하늘과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인간을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끄는 힘, 의식의 진보나 계발과도 연결된다. 이건 전통적인 종교나 철학에서 추구하는 ‘이상’에 가깝다. 성장하고 극복하고 더 나아지는 방향을 말한다.
힐먼은 현대 심리학이 지나치게 정신 중심적이라고 비판했다. 대부분의 치료 접근법이 증상을 제거하고 통합된 자아를 만들려는 정신의 방향성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영혼의 관점에서는 증상이나 병리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 메시지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힐먼의 심리학은 목표가 다르다. 변화(Change)가 아니라 깊이(Depth), 해결(Solution)이 아니라 의미(Meaning)를 추구한다.
다신론적 심리학(Polytheistic Psychology)
제임스 힐먼(James Hillman)의 재미있고 독창적 개념은 바로 ‘다신론적 심리학’(Polytheistic Psychology)이다.
그는 인간의 내면을 단일한 자아(Self)나 하나의 중심으로 통합하려는 것을 반대한다. 대신에, 우리 마음 안에는 여러 개의 자아, 감정, 목소리들이 공존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들을 고대 신화 속 신들에 비유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날은 격렬하게 경쟁심을 느끼고, 또 어떤 날은 완전히 무기력하게 가라앉는다고 하자. 이건 흔히 감정의 ‘기복’이나 ‘불안정’으로 해석되지만, 제임스 힐먼에게 그것은 내 안의 다른 신들이 번갈아 발언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아레스(전쟁의 신)가 말하고, 내일은 하데스(저승의 신)가 올라온다.
그는 이런 식으로 인간의 심리를 다신론적 세계관처럼 이해하는 것이다.
힐먼은 이런 관점이 삶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존중하는 방식이라고 본다. 하나의 ‘정상’에 모든 인간을 맞추려는 시도, 하나의 ‘통합된 자아’만을 추구하는 기존 심리학은 오히려 심리적 억압을 낳는다고 보았다.
“우리 안에는 하나의 자아가 아니라, 전체 판테온이 있다.”
나는 이 말이 너무 공감되어 웃음이 나온다. 가끔 내게 Bacchus(바쿠스:주신)이 찾아 오시면 나는 피하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는 자아를 유지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 속에서 살던 나에게, 힐먼의 다신론적 심리학은 해방감을 준다.
그의 말처럼, 우리 안에는 서로 다른 신들, 목소리들, 이야기들이 공존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바로 나, 김소장이다.
병리학에 대한 재해석
제임스 힐먼의 심리학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것중 하나는 바로 ‘병리’에 대한 시선이다. 힐먼은 기존 심리학이 인간의 감정이나 행동을 ‘정상/비정상’이라는 이분법으로 구분하고, 병리적 상태를 없애려는 데만 집중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 부분은 어느정도 우리네들도 공감되지 않은가?
우울, 불안, 강박, 환상 등의 증상들은 단순히 뇌의 오작동이 아니라 영혼이 무언가를 전달하려는 시도란다. 예를 들어 우울은 삶의 깊이와 의미에 대한 영혼의 갈망을 나타낼 수 있고, 불안은 변화와 성장에 대한 영혼의 준비 과정일 수 있다고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힐먼은 ‘정상성’이라는 개념 자체에 의문을 던진다. 누가 어떤 기준으로 정상이냐는 거다. 오히려 그는 “우리는 모두 병리적이다”라고 선언하며, 병리를 ‘개인의 고유한 스타일’로까지 확장한다. 그 병리 안에 숨겨진 상징, 서사, 이미지들을 이해하지 않고, 단순히 없애버리는 것만이 치료라면, 그것은 영혼의 목소리를 억누르는 것이라고 본다.
결국 힐먼의 병리학은 ‘치료’보다 ‘이해’, ‘교정’보다 ‘존중’에 무게를 둔다. 그는 병리를 해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들여다보고 대화해야 할 존재로 다시 배치했다.
김소장 생각
삶이 점점 더 정답을 강요하고, 사람들의 감정이 데이터처럼 측정되는 시대이다. 오늘날 우리는 끊임없이 “치료”라는 말을 듣는다. 항불안제, 항우울제등등 이상한 감정은 병으로 분류된다.
제임스 힐먼은 말한다.
“당신은 고쳐져야 할 대상이 아니라, 들여다봐야 할 이야기다.”
제임스 힐먼은 참으로 인간적인 것 같다. 그러나 현실에선 망상이 있고, 환청이 들리는 환자들에겐 대화도 어렵고, 그들을 이해하기엔 너무도 어려운 점이 많다. 예전에 본인도 정신병원 근무를 3년간 해본 경험이 있고, 이 글을 쓰다보니 옛생각이 절로 난다.
또한, 이 글이 제임스힐먼을 알아가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길 바란다.
참고로 제임스 힐먼의 책은 국내에도 여러개 있다.
『나이듦의 철학』, 『노인원형과 소년원형』, 『심리치료를 하지만 세상은 왜 갈수록 나빠지는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전쟁에 대한 끔찍한 사랑』등이 있다.
그리고 앞서 포스팅한 토마스 무어가 제임스 힐먼의 제자이므로 영혼의 개념에 대한 결은 같다. 둘 다 칼 융의 분석 심리학파 출신인데, ‘영혼’에 빠진 분들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