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의 삶과 사랑, 그리고 프로이트와의 사상적 차이까지. 정신분석과 사회심리를 잇는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로 알려졌지만, 그는 공인된 정신분석가였다.
생애초기의 지적 토대 – 사상의 뿌리 형성
에리히 프롬은 1900년 3월 23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나프탈리 프롬은 유대인 와인 상인이었고,
가문은 여러 세대에 걸쳐 유대교 랍비를 배출해온 종교적으로 엄격한 집안이었다.
어머니 로자 크라우제는 핀란드계 유대인이었고, 가정 내에서 자주 우울감을 겪었다.
프롬은 외동아들이었기에 어머니의 감정 기복과 아버지의 지나친 과보호 속에서 자라났다.
어릴 때 그는 종종 울고 있는 어머니를 달래야 했고,
지나치게 염려가 많은 아버지에게 끊임없는 간섭을 받으며 자랐다.
그런 유년기의 정서는 프롬에게 ‘관계 속에서의 감정 소외’와 ‘억압된 개성’이라는 문제의식을 심어주었다.
이후 그가 ‘소외’와 ‘자기표현’을 주요 개념으로 발전시킨 배경에는 이런 어린 시절의 가족 경험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릴 적 프롬의 유일한 탈출구는 삼촌인 에마누엘이었다.
그는 프롬에게 유럽 상류층 문화와 예술, 지적 세계를 소개해 주었고,
이 경험은 프롬에게 외부 세계에 대한 동경과 정신적 위안이 되어주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나 역시 청소년 시절 나를 다른 세계로 이끌어준 어른이 한 명쯤은 떠올랐다.
프롬에게 삼촌은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청소년기에 그는 유대교의 경전인 탈무드와 메시아 사상을 공부하며 예언자들의 윤리적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유대교적 권위주의에 대해 회의감도 느꼈다.
한때는 시오니즘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그 안에서 느낀 민족주의적 열광과 배타성에 환멸을 느껴 스스로 거리를 두게 된다.
10대 후반,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사건이 하나 있었다.
가족 지인의 딸이 아버지의 죽음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 사건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이 비극을 접하면서
“왜 사람은 삶을 포기하는가?”,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라는 질문을 품게 되었다.
이 질문은 후에 프롬이 정신분석학과 사회심리학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프롬의 내면을 완전히 흔들었다.
그는 독일 사회에 들이닥친 광기, 국가주의, 집단적 폭력성을 보며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문명은 왜 이렇게 쉽게 무너지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고,
그 질문은 훗날 그의 책, 『자유로부터의 도피』로 이어지는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처음 그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며 그의 삼촌처럼 변호사를 준비했지만,
곧 자신이 추구하는 삶이 ‘법률’이 아닌 ‘인간 자체’에 있다는 걸 깨닫는다.
이후 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로 전과하여 사회학, 철학, 심리학을 공부하며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당시 그는 막스 베버의 동생인 알프레드 베버, 그리고 하인리히 리케르트 같은 학자들의 지도를 받았다.
프롬은 하이델베르크 대학 시절, 철학자 칼 야스퍼스의 사상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야스퍼스는 인간이 고독, 죽음, 책임 같은 극한 상황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자각한다고 보았고, 이러한 실존적 시각은 프롬이 ‘자유’와 ‘불안’을 인간 심리의 핵심 주제로 삼는 데 결정적인 단초가 되었다.
프롬은 이후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야스퍼스식 질문을 던졌다.
“인간은 왜 자유를 원하면서도, 그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려 하는가?”
에리히 프롬과 세명의 여성
사랑은 에리히 프롬의 철학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개념이었다.
그는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능동적인 기술’이라고 했고,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실천과 책임, 존중과 이해’라고 말했지만, 그가 그런 이론을 세울 수 있었던 건 책상머리에서가 아니라, 그의 삶 전체가 사랑과 상실을 반복하는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프롬의 첫 번째 사랑은 프리다 라이히만이었다.
정신분석학자였던 그녀는 지적으로도 앞서 있었고, 나이로도 아홉 살 연상이었다.
프롬이 아직 학문적 뿌리를 내리기 전, 그는 프리다와 함께 하이델베르크에 심리치료소를 세웠고, 함께 환자들을 돌봤다. 사랑은 실천이란 그의 이론처럼, 그들은 말 그대로 사랑을 일과 일상 속에서 실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학문적 방향의 차이,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 그리고 아마도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둘의 시차를 감당하지 못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들은 결국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프롬은 결코 프리다를 가볍게 떠나보낸 적이 없다. 『사랑의 기술』 곳곳에서, 그는 아마도 프리다와의 경험을 돌려 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말한 “사랑이란 상대의 성장과 자유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말은, 아마도 한때 사랑했고 놓아야만 했던 관계의 정수였을 것이다.
나는 그가 쓴 그 한 문장을 읽으며, 나 또한 내게 소중했던 사람을 놓아야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사랑은 늘 아름답기보단 아프고, 아프기에 오래 남는다.
그의 두 번째 사랑, 헤니 구를란트는 또 다른 결이었다. 그녀는 삶에 쫓긴 사람들을 돕던, 치열하게 살아낸 사람이었다. 그녀가 나치 정권하에서 유럽을 탈출하려는 유대인 아동들을 구출하려고 애썼던 삶의 궤적은, 프롬이 평생 중요하게 여긴 ‘인간 존엄’이라는 가치와 닿아 있었다. 그들은 미국에서 만났고, 남편이었던 하인리히 구를란트가 사망한 이후 프롬과 가까워져 재혼했다. 프롬은 그녀와 1950년에 결혼했지만, 그녀는 불과 2년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랑이라는 것이 때론 인생을 들쑤셔 놓고 가는 바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프롬에게 헤니는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오랜 방황 끝에 겨우 도착한 따뜻한 집 같은 사람. 하지만 그 집은 너무 빨리 무너져버렸다. 그는 그 상실 이후 한동안 아무런 글을 쓰지 못했다. 사랑을 이야기하던 사람에게, 사랑은 또다시 상처의 이름으로 돌아왔다.
프롬은 두 번째 아내 헤니 구를란트의 죽음(1952년) 이후 큰 상실감에 빠졌고, 한동안 글도 거의 쓰지 못할 정도였었다.
그런 그에게 아니스 프리먼 이라는 따뜻하면서도 이성적인 위로를 주는 존재가 다가왔다.
아니스 프리먼은 미국 출신의 교육자이자 작가였고, 프롬과는 지적인 교류와 철학적 공감을 통해 가까워졌다.
그녀는 프롬의 사상과 글을 깊이 이해하고 존중했던 사람이었고, 두 사람은 오랫동안 정신적 동반자로 교류했다.
1953년, 프롬은 아니스 프리먼과 세번째 재혼했고, 이후 말년까지 스위스 로카르노에서 함께 거주하며 그녀의 헌신적인 돌봄과 지지 속에서 글을 쓰고 강연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아니스 프리먼은 프롬에게 지적·정서적 안식처였다. 젊은 날의 열정이나 아픔이 아닌,
삶의 말미에 도달한 따뜻한 이해와 평온의 이름이 바로, 프리먼이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사상적 전환
에리히 프롬은 처음부터 이름난 학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우리와 다르지 않게, 가족과 사회, 사랑과 신념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흔들리는 삶을 살아갔다. 특히 유년 시절부터 감정 기복이 심한 어머니와 과잉보호적인 아버지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자라며,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은 관심을 품게 되었다.
이처럼 개인적 삶의 경험은 그로 하여금 인간의 심리와 사회 구조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탐구하게 만들었다.
그의 사상가로서의 전환점은 1920년대 후반,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일명 프랑크푸르트학파)와의 만남을 통해 찾아왔다. 당시 프롬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이 연구소와 연결되면서 본격적으로 지성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이 연구소는 단순한 학술기관이 아니었다.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 철학, 사회학이 혼합된 매우 급진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기존의 사고방식에 도전하는 ‘비판이론(critical theory)’의 산실이었다.
프롬은 그곳에서 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르 아도르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같은 당대의 대표적 사상가들과 함께 교류하며, 사회 구조에 대한 통찰을 넓혀나갔다. 연구소의 연구자들은 “왜 인간은 끊임없이 소외되고, 불행한가?”, “왜 권력은 늘 일부 소수에게만 집중되는가?”와 같은 근본적이고도 불편한 질문을 던지며 사회를 분석하고 비판했다.
프롬은 이러한 질문에 깊이 공감했고, 자신이 고민하던 인간 내면의 문제들이 단순히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게 프롬이 정신분석학과 사회비판 이론을 결합하려 한 이유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을 탐구했지만, 프롬은 여기에 질문 하나를 더했다.
“그 무의식조차, 사회가 만들어낸 건 아닐까?”
나는 이 대목에서, 요즘 우리가 겪는 스트레스나 열등감, 공허함이 단순히 개인 탓이 아니라 ‘이 사회가 이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그의 통찰에 크게 공감한다.
우리는 자주 ‘내가 이상한가?’라고 스스로를 탓하지만, 프롬은 그 대신
“그 감정이 어디서 왔는지를 먼저 물어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 시기에 마르크스의 사회 구조 이론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함께 읽었다.
그리고 둘을 융합해 ‘사회심리학’이라는 독창적 분야를 열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지금 ‘에리히 프롬’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프롬은 프랑크푸르트학파 내부에서도 완전히 같은 입장은 아니었다.
그는 지나치게 엘리트주의적이거나 냉소적인 태도를 경계했고,
“비판만 하지 말고, 대안을 말해야 한다”는 태도를 가졌다.
그래서 점차 연구소 내부와는 거리를 두게 된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유대인이었던 프롬은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한다.
그가 독일을 떠난 건 단지 정치적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그 자신이 새로운 방식으로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려는 방향을
더 깊이 펼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이 시기의 프롬을 보면, 혼란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스스로 열어가려는 사람의 뚝심을 느낀다.
지식이 아니라, ‘사람을 더 잘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그를 계속 움직이게 한 것 같다.
🧠 정통 정신분석학파 vs 에리히 프롬의 정신분석
에리히 프롬은 처음부터 프로이트를 반대한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 인간 내면의 갈등을 들여다보는 정신분석의 틀에 강한 매력을 느꼈다.
1920년대 후반, 그는 베를린 정신분석연구소에서 본격적인 정신분석가로 활동했고,
그 시대를 통틀어 가장 진지한 프로이트 추종자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프롬은 곧 어떤 한계에 부딪혔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인간을 지나치게 본능, 특히 성욕과 공격성 같은 생물학적 본능에만 의존해 설명하고 있었다.(이것은 아들러나, 융도 그렇게 느꼈음)
에리히 프롬은 묻는다.
“사람은 정말로 본능만으로 움직이는가?
우리가 느끼는 외로움, 공허함, 불안은 단지 억눌린 성욕 때문일까?”
그는 인간을 그렇게 단순한 존재로 보지 않았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사회 안에서 만들어진다.”
가정, 교육, 국가, 자본주의 같은 사회 구조가 인간의 무의식과 성격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프롬이 발견해낸 길이었다.
프롬은 정신분석을 해체하지 않았다.
오히려 프로이트가 보지 못한 것들을 덧붙이며 확장하려 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사회이론을 접목시켜
사회심리학(social psychoanalysis)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
다음은 프로이트중심과 에리히 프롬의 정신분석이 어떻게 다른지 표로 정리해 보았다.
구분 | 정통 정신분석학파(프로이트 중심) | 에리히 프롬의 정신분석 |
이론 창시자 | 지그문트 프로이트 | 프로이트 계승 + 비판적 재해석 |
핵심 개념 | 무의식, 성욕(리비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초자아 | 자유, 사랑, 소외, 사회구조와 성격 |
인간 이해 | 성·공격 본능 중심의 생물학적 이해 | 사회적·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 이해 |
병리 원인 | 억압된 본능, 무의식적 갈등 | 사회 구조에 의한 소외, 비인간화 |
치료 중심 | 개인 내면의 무의식 분석 | 개인 + 사회 맥락 통합적 분석 |
관계성 | 치료자 중심, 해석적 | 상호작용 중심, 이해와 공감 중시 |
사회비판 | 상대적으로 약함 | 매우 강함 (자본주의, 전체주의 비판) |
대표 저작 | 『꿈의 해석』, 『정신분석 입문』 | 『사랑의 기술』, 『자유로부터의 도피』 |
표는 에리히 프롬이 단순히 프로이트의 변형 버전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사유의 세계를 연 사람이라는 걸 명확히 보여준다.
나는 프롬의 이런 태도가 참 좋다.
존경하되, 비판하고…
배우되, 다시 묻는…
그는 프로이트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프로이트를 딛고 더 넓은 인간 이해로 나아가려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프로이트의 업적은 위대하다. 그러나 인간은 그보다 훨씬 더 넓고 깊다.”
프롬은 정신분석을 인간을 해부하는 칼이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한 창문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그 창문 너머에, 우리는 나와 당신, 그리고 이 사회 전체를 함께 볼 수 있다.
📚 에리히 프롬 저서 연대기
에리히 프롬의 저서목록을 다음과 같이 정리 해본다.
출간 연도 | 저서 제목 | 원제(영문) |
1941 | 자유로부터의 도피 | Escape from Freedom (영국판: The Fear of Freedom) |
1947 | 인간 본성에 대하여 | Man for Himself: An Inquiry into the Psychology of Ethics |
1950 | 정신분석과 종교 | Psychoanalysis and Religion |
1955 | 인간의 마음 | The Sane Society |
1956 | 사랑의 기술 | The Art of Loving |
1959 | 지니는 것과 존재하는 것 | Sigmund Freud’s Mission |
1964 | 인간 파괴의 해부 | The Heart of Man: Its Genius for Good and Evil |
1966 | 소유냐 존재냐 (초기 개념 등장) | You Shall Be as Gods |
1973 | 소유냐 존재냐 | To Have or To Be? |
1975 | 희망의 혁명 | The Revolution of Hope: Toward a Humanized Technology |
1976 | 삶의 미학 | Greatness and Limitations of Freud’s Thought |
1981 | 인간 이해를 위하여 (사후 출간) | On Being Human |
그의 대표작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이다』. 이 책은 당시 500만 부 이상 팔렸고, 28개의 언어로 번역될 정도로 대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저서중 가장 유명한 책은 『소유냐 존재냐』이다. 1966년에 먼저 유사 개념을 다룬 저작 You Shall Be as Gods를 발표했고, 1973년작이 이 주제를 완성된 형태로 발전시킨 책이다.
1981년 이후 책들은 대부분 사후에 유고 원고나 강연 내용을 정리한 형태로 출간된 것들이다.
한국에서는 『사랑의 기술』이 가장 유명한 책같다.
『사랑의 기술』의 일부 내용은 국내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발췌되어 실린 적이 있으며,
사랑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전달하는 교육 자료로 활용되기도 했다.
P: 에리히 프롬은 우리나라에서는 책 사랑의 기술의 저자로 잘 알려져있지만, 그가 프로이트사상의 정신분석 훈련을 받은 공인된 정신분석가라는 것은 많이들 모를겁니다.
그의 첫번째 부인도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 였지요.
다만, 프로이트가 성본능이나 무의식을 강조했다면, 프롬은 사회또는 문화가 인간 심리에 미치는 영향을 더 중시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를 사회심리학자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에리히 프롬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되시길 바랍니다.